앙토냉 아르토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는 프랑스의 마르세이유 태생이다. 1920년에 파리로 와 배우가 된 아르토는 뤼녜-포, 샤를르 뒬렝, 루이 주베, 조르주 피토예프 같은 일부 주요 연출가들과 함께 작업을 했다. 그는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그가 맡았던 가장 유명한 역은 칼 드라이야의 '잔다르크의 수난'에 등장하는 수사였다.
아르토는 1920년대 초반까지 초현실주의 연극 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신비술과 아시아 종교,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초현실주의 운동의 지도자인 앙드레 브르통은 그를 축출했다. 아르토는 평생 동안 정신적인 혼란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혼란을 겪으며 약물을 스스로 흡입하여 손수 실험을 했다고 한다.
아르토의 저서 및 이론은 대부분 1930년대에 쓰여졌다. 그의 저서와 이론들은 생존 당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1960년대의 실험주의 연극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예지 그로토프스키(Jerzy Grotowski)와 피터 브룩(Peter Brook) 그리고 리빙 시어터(the Living Theater)등이 아르토의 잔혹연극에서 부분적인 영감을 얻었다.
잔혹연극
앙토냉 아르토는 앞서 말했듯 초현실주의에 처음부터 가담했던 사람으로 1930년대에 쓴 일련의 수필과 선언문을 통해 잔혹연극(theatre of cruelty)을 이론화했다. 그는 서구 연극이 전체적인 변화를 필요로 하며 문학의 전통이 의식적인 기원에 비추어 반연극적이므로 서구의 연극 예술가들은 동양연극을 연구하여 양식화해야 한다고 믿었다. 문학적 전통을 포기함으로써 아르토는 '더 이상의 걸작이 없음'을 주장했다. 이것을 통해 그는 역사적 의미만을 목적으로 하는 고전이라면 생산되어서는 안 되지만 혹시 현대 관객들과 연관성을 담보한다면 생산되어야 한다는 뜻을 표명했다. 더 나아가 그는 대본이 신성한 대상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으므로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대본은 재작업 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르토에게는 연극이 문학적 행위가 아니라 감각적 경험이었으며, 감각을 강조하는 것이 잔혹극의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아르토는 잔혹성이라는 용어를 문자 그대로 연극 예술가들이 관객들을 공격하고 거칠게 다루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바로 보닌 이들의 감각이 공격을 당해야 함을 의미한 것이다.
아르토에게 연극은 전염병처럼 전파되어 현대 사회의 모든 추함을 씻어낼 수 있는 존재와도 같았다. 아르토는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혁신적인 이론가였다. 하지만 무대디자이너, 아돌프아피아와 에드워드 고든 크레이그처럼 아르토에게는 생전에 자신의 이론을 실행해볼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이후 수 십 년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아르토 자신의 삶도 스스로의 이론에서 다루었던 많은 고뇌와 고통을 반영하고 있었다.
잔혹연극 특징
- 서구 연극의 전체적인 변화를 필요로 하며 발발
- 동양 연극을 연구하여 양식화
- 문학적 행위가 아닌 감각적인 경험
- 관객의 광기를 이끌어내는 것
- 감각이 공격 당해야함을 의미
- 인간의 선천적인 폭력성과 공격성이 잔혹극을 통해 정화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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